한 도시에서 나를 이해한 날
어떤 도시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감정의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춰줍니다. 처음 가보는 곳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하고, 말로 설명할 수…
어떤 도시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감정의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춰줍니다. 처음 가보는 곳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도시.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삶에 중요한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저에게 그런 도시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고요한 도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그곳에서 저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정확하게 이해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한 도시에서 나를 이해한 날, 그 감정의 흐름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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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으로 시작된 하루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날은 맑았습니다. 일정 없이 천천히 강변을 걸었고, 오래된 건물과 돌길, 고요한 분위기가 이상하게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이방인의 자유로움 속에서, 저는 ‘해야 할 일’이 아닌 ‘느끼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벤치에 앉아 강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 질문은 평소엔 너무 바빠 꺼내지 못했던 질문이었고, 하이델베르크는 조용히 그 질문을 받아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감정이 조용히 깨어나는 도시
이 도시의 가장 큰 힘은 ‘재촉하지 않는 풍경’이었습니다. 특별한 자극 없이, 그저 조용히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곳. 천천히 흐르는 넥카 강, 강가를 따라 걷는 사람들, 말없이 앉아 있는 노부부. 그 속에서 저 역시 조용히 제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도 미뤄두고 있던 감정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외면했던 외로움, 말하지 못했던 서운함, 해소되지 않은 죄책감. 이상하게도 이 도시에선 그 감정들과 마주하는 것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풍경이 아닌 ‘침묵’이 위로가 되어줄 때
하이델베르크 성 근처에서 내려다본 도시 전경은 아름다웠지만, 저를 움직인 건 그 풍경이 아니라 침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고, 도시도 말이 없었고, 제 안의 감정 역시 조용히 움직였습니다.
말없이 흐르는 공기,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공간. 그 침묵은 억지로 무엇을 해결하려 들지 않았고, 그 안에서 저는 스스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참 버텼구나.”
이 말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날 저 자신에게 조용히 건넨 첫 위로였습니다.
여행지가 아닌, ‘내 마음이 도착한 곳’
이후 다른 도시들을 여행했지만, 하이델베르크만큼 깊이 남는 도시는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곳은 제가 여행하러 간 곳이 아니라, 제 감정이 먼저 도착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장소는 도착한 순간부터 마음속 깊은 곳과 연결되며, 언어보다 빠르게 감정을 흔들어 줍니다. 하이델베르크가 바로 그런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그 감정은 제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말로 정리되지 않아도 남는 감정
그날의 경험은 일기장에도, SNS에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감정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완전히 감정으로 통과된 하루였기 때문입니다.
기록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기억. 우리는 평생에 단 몇 번 그런 날을 만납니다. 저에게 그 하루는, 한 도시에서 나를 이해한 날이었습니다.
그 도시는 아직도 내 안에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지금도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바쁘고 지칠 때면, 문득 그 도시의 돌길과 강가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도시를 떠올릴 때마다, 저는 다시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백을 얻습니다.
그곳에서 보낸 하루는 ‘여행의 추억’이 아니라, ‘나와 다시 연결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