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여행 중이라는 감정
여행은 일정을 짜는 순간부터 시작되지만, 진짜 감정은 어느 조용한 순간에 비로소 찾아옵니다. 길을 걷다 말고 문득, 낯선 풍경…
여행은 일정을 짜는 순간부터 시작되지만, 진짜 감정은 어느 조용한 순간에 비로소 찾아옵니다. 길을 걷다 말고 문득, 낯선 풍경 앞에서 숨을 고르다 말고, 우리는 “아, 나 지금 여행 중이구나”라는 감정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것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쁨보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감정입니다. 저는 독일을 여행하며 그런 감정을 자주 마주했습니다. 여행지의 정적이 주는 선명한 감각, 그것이 진짜 여행의 중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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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감각
하이델베르크의 오래된 돌계단을 천천히 오르던 어느 날, 저는 특별한 목적도 없이 그저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잠시 멈춰섰을 때, 갑자기 현실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래, 나 지금 여행 중이야.”
지도도, 카메라도 없이 그저 몸이 움직이는 그 순간,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충만함으로 채워졌습니다. 그 감정은 설렘이나 흥분이 아니라, 일상에서 잘 느끼지 못했던 ‘존재의 밀도’에 가까웠습니다.
평소보다 더 선명해지는 감각
프라이부르크의 조용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바람 소리, 발자국 소리, 그리고 머릿속 생각까지 또렷하게 들려옵니다. 그 선명함은 평소라면 스쳐갔을 감정을 붙잡고, 마음을 현재에 정박시켜 줍니다. 여행 중이라는 감정은 그렇게 ‘지금 여기에 있음’을 확인하는 감각이기도 합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순간조차 특별해집니다. 일상에서라면 무심코 넘겼을 풍경이, 여행지에서는 하나의 장면으로 마음속에 남습니다. 독일의 도시들은 그런 순간을 선물해주는 감정적인 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여행 중이라는 감정은 단순히 다른 공간에 있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삶에서 잠시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베를린의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들었던 감정, 밤베르크의 다리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느꼈던 감정. 그 순간들 속에서 저는 평소엔 미처 몰랐던 제 감정의 결을 느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지?”, “어떤 감정을 잊고 있었지?” 그런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마음을 스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답보다 중요한 ‘감정의 현재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여행은 장소보다 순간의 감정이다
우리는 종종 여행의 의미를 목적지에 둡니다. 어디를 갔고, 무엇을 봤는지에 집중하지만, 정작 오래 기억에 남는 건 특정 장소보다 그 장소에서 느낀 감정입니다. “그때 햇살이 따뜻했지”, “그 길에서 울컥했었지” 같은 기억이 그렇습니다.
뮌헨의 어느 공원, 사람들 틈에 섞여 앉아 있을 때 문득 느낀 감정. 설명할 수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 퍼졌던 그 순간이야말로 여행의 정수였습니다. 여행 중이라는 감정은 ‘특별한 장소’가 아닌 ‘깊은 순간’에서 피어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신
마지막으로, 여행 중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지금. 숨을 쉬고, 눈을 뜨고, 낯선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정은 깨어납니다.
독일 여행은 그런 감정을 자주 선물해주었습니다. 도시는 조용했고, 사람들은 친절했으며, 풍경은 감정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서 ‘지금’을 더 자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